농부시인 시시콜콜 제주살이(21)
농부시인 시시콜콜 제주살이(21)
  • 서귀포방송
  • 승인 2019.02.2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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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정희성 농부시인

고사리 취나물 시래기 나물에 잡곡밥 한 그릇, 대보름 시절식 아침상을 물리고 오늘도 볕 좋은 바다로 내려왔습니다. 선방의 '동안거'는 면벽좌선에 화두와 씨름하는 공부이거니와, 농부시인의 동안거는 망중한에 기댄 간세다리 놀음이라 바닷가 산책이 고작입니다.

유채꽃길을 두어 바퀴 돌고나서 해송 그늘 아래 솔방울을 줍다가 물끄러미 등대를 내다봅니다. 저만치 신천리 포구 방파제 등대입니다.

빨간색과 하얀색 두 개. 뭍에서 바다 쪽으로 보아 왼쪽은 빨간색, 오른쪽은 하얀색입니다. 배도 우측통행이라 귀항 때는 빨강등대를 오른쪽에 끼고 들어오고 출항 때는 하양등대를 오른쪽에 끼고 나갑니다. 물 가운데 선 하나 눈대중으로 그려놓고 비껴 드나드니 동시에 엇갈려도 부딪칠 리가 없습니다.

하양등대는 돛에 부풀려 담은 희망의 빛깔인 듯 싶습니다. 만선을 알리는 깃발이 오방색일 수 있는 것은 떠날 때의 마음가짐이 이리 비움의 색으로 바탕이 넓기 때문이겠습니다. 사람욕심 부리지 않고 해신할망의 후함을 기대하는 어부의 발원이 봄빛으로 더욱 선명한 날, 하양등대는 지아비를 배웅하는 바다아낙처럼 처연하기도 합니다.

먼거리에 자꾸 눈이 시려 깜박이다, 울컥 그리움 한 됫박 길어올렸습니다. 하얗게 표백되어 초성마저 떠오르지 않는 이름들이 등대 너머에서 아른거립니다.

빨강등대로라도 서서 그 이름들을 불러들이고 싶은데, 솔방울 옆 개똥을 집어들 뻔해 초랭이방정을 떨고 맙니다.

집으로 돌아와 향수병자처럼, 몇 군데 전화를 겁니다. 선후배들에게 새해 인사를 여쭙다가, 원로소설가이신 선배님 한 분께는 '형편은 뻔하나 그럭저럭 견디며 사는 재조를 익혔다'고 뻐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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