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시인 시시콜콜 제주살이(27)
농부시인 시시콜콜 제주살이(27)
  • 서귀포방송
  • 승인 2019.03.26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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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정희성 농부시인

몹시 그리워서 등대로 가자
너와 나의 거리가 명왕성까지라도
저리 벌겋게 달아
불 하나 밝히면

몹시 서러워서 그집에 가자
게들이 걸어나오는 골목을 지나
토방 속 터져나오는 마른 기침
빈처가 봉지쌀을 이는 부뚜막에
수양복사 꽃향 한 됫박

서귀포 오거든
그날이 언제든

(졸시 '만행')

토요일 오후 서귀포에 갔다. 내 사는 성산도 서귀포 권역이나, 한라산 남쪽 산남 사람들이 서귀포라 하면 원서귀포를 말한다. 1도 2군 2시로 행정구역을 나누던 시절, 서귀포시청 동문로터리를 중심으로 해안과 중산간에 펼쳐진 동지역과 서귀포항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서귀포에 가면 쇠소깍에서 거닐다가 매일시장에서 요기하고 이중섭미술관 근처를 배회하는 것이 버릇처럼 굳은 여정이다. 오늘은 강정 구럼비가 보고 싶어 천지연 거쳐 강정까지 다녀왔으니 파격이라 하겠다.

이중섭미술관에서 이중섭주거지로 내려가는 사잇길에 수양복사꽃이 한창이다.

병든 과천노인 추사는 '과우즉사'라는 오언절구에서 첫 행을  '정반도화읍'이라 읊었다.
- 뜨락 한켠 복사꽃이 눈물 흘리네.
병든 몸인 자신이 가여워 복사꽃마저 붉은 울음이라는 감정이입이다.

이중섭의 복사꽃은 오늘, 환하게 웃고 있다. 농염하기까지 하여 자꾸 고개를 돌리게 한다. 은박지에 게그림을 그리다 말고, 중섭선생이 삐걱 쪽문을 열 것 같다.
- 자네 또 왔는가?

이번엔 선생의  목소릴 들은 것 같아 고개를 한번 더 돌린다. 꽃그늘 밟으며 소녀들이 까르르 자지러지는 서귀포, 봄이다.

※ 과우즉사의 첫 행은 산처럼이 펴낸 안대희 선생 편역, <다행히도 재주 없어 나만 홀로 한가롭다>에서 가져온 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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