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4·3으로 잃어버린 큰 마을 "무등이왓" 탐방길에서
【수필】​ ​4·3으로 잃어버린 큰 마을 "무등이왓" 탐방길에서
  • 김연화 기자
  • 승인 2022.11.23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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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서귀포룸비니청소년선도봉사자회
- 제주역사 바로알기 프로그램 운영
- 아이들과 함께하는 ‘무등이왓’
- 제주4.3사건 당시 제주의 아픈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비극의 현장 탐방
김문석 수필가, 범죄심리사
김문석 수필가, 범죄심리사

(사)서귀포룸비니청소년선도봉사자회에서 주최하는 제주역사 바로알기 프로그램 운영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한 ‘무등이왓 마을’

제주4.3사건 당시 잃어버린마을 제주의 아픈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비극의 현장 탐방길에서 당시 그 날에 처참했던 현장 '최초 학살터','잠복학살터',무등이왓 마을이 번성했던 역사를 볼 수 있는 개량 서당인 '광선사숙' 등이 있었던 자리에 쓰여진 표지판들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어 프로그램 운영시 마다 아이들과 함께 자주 찾고 있는 곳이다.

제주4.3당시에는 무등이왓마을은 중문면과 이웃한 안덕면의 중산간 마을의 이름으로, 4·3으로 잃어버린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며 4·3 당시 130호가 넘었던 무등이왓은 동광리의 중심마을이었다고 한다.

탐방에 나선 우리 일행들은 무등이왓 마을 입구에서 전영미 문화해설사가 무등이왓 탐방전에 제주4.3사건당시 무등이왓 마을이 잃어버린 마을 비극의 현장이 된 사연들을 먼저 해설을 통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농사를 짖는 토지와 무등이왓 마을에 사람들이 살아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는 대나무들이 자라고 있었고, 마을 곳곳에는 당시의 참상에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무등이왓 안길을 조금 걸어들어 가다보면 무등이왓에서 처음 학살이 자행된 '최초 학살터'라는 표지판이 학살터 입구에 세워져 있어 당시의 참혹했던 현장을 느끼게 한다.

1948년 11월 15일 무장대 토벌작전을 수행하러 온 토벌대들이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주민 10여명 불러다 잔혹하게 폭행하고 일부를 사살하면서부터 이 곳 무등이왓 마을에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동맥 역할을 한 중심 길을 따라 다시 곧바로 걷다 보면 갈림길 좌측 길로 접어들면 '잠복학살터'가 나온다. 이 곳 학살터에도 잠복학살터 입구에 ‘잠복학살터’라고 쓰여져 있는 표지판이 그 날의 아픔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토벌대들에게 끌러간 가족들이 참혹하게 학살된 곳에 찾아가 가족 시신을 수습하려고 온 주민들에게 대나무 밭에 숨어있던 토벌대가 저승사자처럼 갑자기 나타나 주민들을 토벌대가 에워싸 한 곳에 모여 앉히고 주민들 주위에 짚더미나 멍석 등을 쌓아놓아 그대로 불을 질러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주민들이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스럽게 학살한 곳이 이 곳 잠복학살터라고 한다.

여기 잠복학살터에서 희생된 희생자들은 여성과 어린이 등 노약자가 대부분으로 저항할 힘조차 없었던 선량한 무등이왓 주민들이었다.

게중에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잔인한 학살에 몸서리 칠새도 없이 언젠가는 자신들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숨을 수밖에 없었다.

50여 일 동안 피신해 있던 큰넓궤가 알려지자, 무등이왓 주민들은 같이 숨어 지내던 이웃마을 사람들과 함께 겨울눈이 무릎까지 차오른 산길을 걸어 영실부근의 볼레오름까지 올라가 피신했으나 그들이 남긴 눈 위의 발자국을 따라 산을 에워싸며 올라온 토벌대는, 보이는 사람들을 체포하거나 총살했다.

토벌대는 큰넓궤에 모여들었던 120여명의 주민들을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의 단추공장 건물에 임시 수용했다가, 주민 모두를 정방폭포 위에서 또 집단학살에 나섰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살았던 나머지 사람들도 무등이왓을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생존자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는 현장이었다.

당시 유일하게 혼자 숨었다가 살아났다는 신원숙 할아버지는 당시 큰넓궤에 숨어 있다 살아난 몇 안 되는 증인들과 신원숙 할아버지의 처인 이태숙 할머니는 "동굴 밖에 다닐 때는 발자국이 나지 않게 돌만 딛고 다녔거나 마른 고사리를 꺾어다가 발 디딘 곳에 꽂아 두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며 당시 생존 할아버지의 건강할 때 했던 증언을 오늘 탐방현장에서 전영미 해설사로부터 생생하게 당시 비극에 역사의 현실을 해설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무등이왓은 1949년 말까지 예비검속으로 마을 출신 주민이 학살되는 아픈 역사가 이어졌고, 1955년 제주에 몰아친 광풍이 가라앉자 다른 마을들은 재건해 안정을 되찾았지만 무등이왓 마을만은 지금까지도 아픔에 역사현장에서 치유되지 못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학살당하는 현장을 두 눈뜨고 보았던 터라 공포와 겁에 질린 생존자들도 마을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현재의 동광리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1600년대 중반 관의 침탈을 피해 쫓기던 사람들이 들어와 화전을 일구고는 있으나 정착은 아직도,.... 한 때는 130여 가구가 살았을 정도로 큰 마을이던 무등이왓 설촌이 3백여년 만에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무등이왓에서 있었던 잔혹한 역사는 1948년 제주섬 사람들이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한다”는 미군정 소개령을 듣고 피난길에 오르며 겪었던 혹독한 겨울을 담아낸 작품, 제주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4·3 이후 67년 만에 무등이왓이 '동광마을 4·3길'이란 이름으로 제주의 아픈역사를 바로 알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당시에 비극의 현장이 슬픔을 대신하고 있었다.

정겨운 무등이왓 옛 마을길과 당시의 집터 주변에 들어선 대나무들이 바람결에 한들한들 거리며 무언의 슬픔을 실어 이 곳을 찾는 탐방객들의 귓가에 제주의 아픈역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음에 나 또한 가슴속 깊이 울컥한 마음이 전해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동안 아픈 신음소리조차 못 내던 팽나무도 무등이왓 마을 중심에 꿋꿋하게 버티고서서 지난 아픈 세월에 무게를 이겨내고 이제는 역사의 현장을 찾는 방문객들이 왕래가 잦아지면서 푸른 기운의 생기를 되찾아 그날에 있었던 참혹한 비극의 현장을 증언해 주고 있었다.

잃어버린마을 무등이왓 가는 곳곳마다 옛 마을 선인들이 피해를 당한 고통의 세월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다. 1948년 12월 12일과 13일에 있었던 ‘잠복학살터’에서 무등이왓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토벌대들이 저지른 비인간적이고 패륜적인 만행들이 회자되고 있었다.

제주의 아픈 역사와 그 역사가 살아있는 무등이왓에서 참혹하게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 오래전 이미 이마을은 없어졌지만 잊지않고 기억하여 다시는 이런 아픔의 역사가 또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지난 제주의 아픈역사를 바로 배워야 하고 비극의 아픈 역사를 바로 알릴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는 것은 어떠한가?

이 곳에서 희생된 선인들은 다 우리의 조상들이다. 무고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제주의 아픈역사를 바로 알고 잊지말아야 한다.

역사는 왜곡 되어서도 안되고 진실은 올바르게 밝혀져야 한다. 그 아픈역사는 후손들이 역사현장을 탐방하면서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우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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