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명사 칼럼] 세계의 역사를 바꾼 물고기, 대구(하)
[인류문명사 칼럼] 세계의 역사를 바꾼 물고기, 대구(하)
  • 서귀포방송
  • 승인 2020.12.21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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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 칼럼니스트.
KOTRA 밀라노 무역관장. 세종대학교 대우교수.
(저서) 유대인 이야기, 세 종교 이야기 등 다수
홍익희 칼럼니스트
홍익희 칼럼니스트

미국에 이민간 초기 유대인들은 맨해튼 어촌에서 그들이 네덜란드에서 취급했던 청어와 대구 잡이를 시작했다. 가장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맨해튼 앞 바다에도 청어와 대구가 있었지만 가까운 매사추세츠 근처 케이프 코드’(Cape Cod Bay)에 특히 대구가 많았다. ‘코드’(Cod)라는 단어 자체가 생선 대구를 뜻한다. 그 앞바다는 대구 산란철이 되면 말 그대로 물 반, 대구 반이 되었다.

지금도 그곳은 세계 4대 어장의 하나이다. 먼 바다의 대구가 산란철인 12월에서 3월 사이 연안으로 알을 낳으러 몰려든다. 대구가 번식기에 알을 낳고 정자를 뿌리기 시작하면 바다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대구가 너무 많아 어선들이 항해하기 힘들 정도였고, 낚시 없어도 뱃전에서 양동이를 내려 대구를 퍼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유대인들이 구대륙 유럽(네덜란드)에서 살던 시절부터, 대구와 청어 소금 절임은 유대인들의 주요 상품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 있어 말린 대구는 바다의 빵으로, 거의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기도 했다. 특히 금식일이나 종교 절기에는 육류와 누룩 든 빵을 금해 유대인들은 육류와 빵 대신 말린 대구와 절임청어를 먹었다. 1650년이 되자 뉴포트 항구가 있는 뉴잉글랜드는 대구 무역 덕분에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뉴잉글랜드로 몰려들다.

1776년 대구잡이 항구 뉴포트의 유대인은 1,200명으로, 항구 전체 인구의 20%에 달했다. 그들은 네덜란드에서 그랬듯이 대구 처리와 소금 절임을 분업화하고 표준화했다. 그리고 철저한 품질관리와 서비스로 전국적인 유통을 장악해 이를 기업화했다. 이는 네덜란드에서 그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절임대구는 날개 돋힌듯 팔려나갔고, 덕분에 이윤이 많이 남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 어업으로 부를 축적한 대구 귀족들이 생겨나면서 유대인 부자들도 많이 탄생했다. 그 뒤 유대인 부자들은 높은 교육열로 대학설립에 재정지원을 많이 했다.

1769년에 설립된 로드아일랜드 대학은 모든 학생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고, 기독교 종교행사에 유대 학생들의 강제 참여를 면제해 주었다. 유대인에게 종교의 자유와 교육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때부터 유대인 부호들의 명문대학 설립과 재정지원은 일종의 전통처럼 자리 잡았다. 대구는 이렇게 대항해시대를 열어 신대륙을 주류 역사에 편입시켰지만, 그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이 탄생한 배경에도 대구의 발자국이 드리워져 있다. 유대인 노예 무역상들은 질 좋은 대구는 유럽으로 수출하고 나쁜 것들은 카리브 해의 사탕수수 농장에 팔았다.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노예들이 이 대구를 먹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다. 유대 상인들은 그곳에서 당밀을 수입해서 럼주를 만들어 아프리카에 팔고, 그 돈은 다시 카리브 해 농장에서 일할 노예를 사오는 데 쓰였다. 그러던 와중 영국 왕이 식민지 뉴잉글랜드의 가장 중요한 교역상품인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까지 만들자, 화가 난 식민지 사람들이 독립전쟁을 벌인 것이다.

1782년 식민지 사람들과 영국 사이의 평화 협상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 역시 새롭게 독립한 미국의 대구 잡이 권리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국가의 영토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영해다. 국가의 수자원 산업은 일반적으로 영토로부터 200해리에 해당하는 범위에서 보호되는데, 이것을 흔히 배타적 경제수역(EEZ)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배타적 경제수역 역시도 대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 알고 있는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기술이 발달하며 어업 기술 역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산업혁명 직후에는 일반적으로 1킬로미터 반이나 되는 긴 낚싯줄에 천여 개의 낚싯바늘을 매단 주낙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어부들은 이 주낙 방식으로 엄청나게 많은 대구를 잡았다. 이 때문에 바다 속 대구의 수가 줄어들자, 아이슬란드와 영국은 아이슬란드해의 대구 어업권을 둘러싸고 세 번에 걸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대구 전쟁이 끝난 1975년에, 아이슬란드는 해안으로부터 200해리 내에서는 자기 나라 어선만이 어업을 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잇따라 다른 나라들도 자기 나라 어부들을 위한 어업 지역을 선포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바로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이 탄생한 배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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