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태영호의원이 밝힌 제주4·3사건 재해석
[기고] 태영호의원이 밝힌 제주4·3사건 재해석
  • 서귀포방송
  • 승인 2023.02.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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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필명)

 

국민의힘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한 태영호 의원이 지난 12일 제주를 찾아 “제주 4·3 사건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말했고, 4·3 사건 관련 단체들은 사실 왜곡이라며 태 의원의 사과와 후보직 사퇴를 촉구했다. 15일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 태영호 후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과거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시작됐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누명을 밝혀줘야 한다라고 했는데 이에 동의 하시는지'라는 질문에 "동의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말씀하신 거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노무현 정부 때 처음 나온 진상 때도 무장 폭행이라는 점은 인정했다"라며 "저는 김대중 대통령의 그 말씀에 전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한다"라고 답했다.

제주 국회의원들은 “우리는 4·3을 왜곡·폄훼한 태영호 의원에 대한 명백한 책임을 묻기 위해 국회 윤리위원회에 징계안을 제출하고, 태영호 의원의 사과와 국회의원·최고위원 후보 사퇴를 강력히 요구한다”면서 “아울러 국민의힘 역시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오영훈 제주도지사도 제주도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의힘은 4·3의 상처가 진심으로 치유되길 원하고, 태영호의 망언과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태 의원을 당장 제명하고 당 차원에서 공식 사과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 제주도당과 정의당 제주도당도 한 목소리로 태영호 의원을 비판했으며,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4·3연구소, 4·3도민연대, 제주민예총, 4·3기념사업위원회, 4·3평화재단 등 도내 단체뿐 아니라 사단법인 제주4·3범국민위원회와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회,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 사단법인 제주바람 등 서울지역 4·3관련 단체들까지 성명을 내고 태영호 의원의 사과와 책임있는 행동을 요구했다.

4·3민심 달래기에 공을 들여온 국민의힘 제주도당도 태영호 의원의 제주발 ‘4·3은 김일성 지시로 촉발’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자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허용진 도당위원장은 “태영호 의원의 발언은 제주도민의 뜻과 정면 배치된다. 도민들에게 아픈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는 이상한 언동이었다”며 “가슴도 아프고 도민에게 죄송스럽다. 매우 유감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필자는 제주4·3사건의 진실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제주4·3사건 당시 제주도 일원에 뿌려진 제주도인민유격대
(남로당 제주도당 산하 군대조직)의 삐라 내용.

1949년 1월13일 북제주군 구좌면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위원회가 제작한 이 삐라는 “조국해방의 결정적 계기인 (1949년) 1월 1일을 기하여 전민족은 총궐기하였다”면서 “김일성 수상은 1월 1일 신년사에서 장래에 남반부 동포들에게도 노동자에 노동법령을, 농민에게 토지개혁을, 여성에게 남녀평등권을 실시케 하며 미제를 철수시키고 매국단정을 타도하겠다”고 밝혔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러분! 김일성 수상의 성명서가 구체화 될 날도 시간문제이며 인민군의 원쑤(대한민국을 지칭)를 섬멸시킬 날도 가까워졌습니다”고 밝혀 제주4·3사건이 1949년 1월 이후 김일성의 지시를 따르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4월 3일 제주도인민유격대 무장폭도들은 스스로를 ‘제주인민해방군’이라 칭하면서 북한의 혁명가요인 ‘적기가’와 ‘인민항쟁가’를 부르면서 제주도내 경찰지서 24개중 12개소를 비롯한 수많은 관공서 건물을 약탈·방화하고, 우익인사와 군경가족을 습격·살해하는 등 폭력적 수법으로 반인륜적인 살인 만행을 저질렀다. 주동자인 김달삼(金達三)은 박헌영의 지령에 따라 폭동이 진행 중이던 1948년 8월 2일 제주에서 선박편으로 목포를 거쳐 월북, 8월 21-25일 해주에서 열린 이른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해 ‘제주4·3투쟁보고’를 하고, 대한민국의 타도를 외치며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렀다.

당시 김달삼과 함께 제주4·3사건을 주도하고 월북한 남로당 제주도당위원장 강규찬(姜圭贊)과 그의 부인 고진희(高眞姬), 이정숙(李貞淑), 안세훈(安世勳) 문등용 등 5명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이들 가운데 특히 주목할 인물은 강규찬이다. 강규찬ㆍ고진희 부부는 4·3무장폭동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을 직접 만났으며 그로부터 특별히 공작임무를 받고 다시 제주도로 파견됐다. 이는 제주4·3사건이 김일성과 북한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일어났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는 대목이다.

제주 4·3사건이 대한민국의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계획적인 공산폭동이란 사실은 이밖에도 △4·3의 주체가 공산주의자이며 목적은 공산통일조국 건설이라고 한 제주도인민유격대 대정면 위원장 이운방의 증언 △1948년 10월 24일 김달삼의 뒤를 이은 제주도인민유격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와 함께 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사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주도인민유격대가 인민군지원환영회를 조직하고, 북한군 상륙시 합세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고 획책한 사실 △5·10선거 때 남로당이 인민공화국 건설을 주창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전국 200개 선거구중 북제주 2개 선거구 선거가 실시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제1대 제주인민유격대사령관 김달삼의 월북 이후 제2대사령관 김덕구(1949년 6월 7일, 경찰에 사살)의 직속부하인 ‘양생돌’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극비 메모인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독자적인 거사가 아니라 북과 연계된 전남도당으로부터 지령과 지도를 받아 5·10 단선과 단정을 반대하고 유엔감시위원단을 축출하기 위해 게릴라 전술과 조직 및 선전에 전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기획하고 연출한 조직적인 무장-선전 투쟁이었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제주4·3사건이 박현영이 이끈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따라 일어난 ‘무장폭동’이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의 1948년 4월 3일자, 20일자, 6월 8일자 및 11월 7일자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또한 미24군단 G-2(정보참모부)일일보고서(1948년 2월 6-7일), 동아일보 제주도폭동 현지답사 기사(1948년 5월 8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결성식 선언문(1949년 6월 25일) 등 각종 자료가 남로당에 의한 계획적인 폭동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의 1948년 6월 8일자는 <조국을 방어하기 위하여 민족의 선두에서 사투하는 제주도 애국 동포를 구출하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남로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초안을 지지(1948년 3월 3일) 했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인민공화국 만세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고 보도함으로써 노무현 정부의 발표처럼 4·3사건이 단순히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맞서 일어난 사건이 아님을 그들 스스로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1993년에 소련의 비밀문건 해제로 확인된 바에 의하면 소련의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자로 “북한에 단독정부를 구성하라”는 지령을 내린 사실, 그리고 이 지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던 평양주둔 소련군 정치담당 부사령관 스티코프의 일기형식으로 된 비망록에 따르면 소련군정이 김일성의 북로당과 박헌영의 남로당을 완전히 장악했던 실상이 나타나 있으며 1946년 9월의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시, 남로당 당수 박헌영에게 200만엔과 300만엔의 공작금까지 제공하며 투쟁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특히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을 앞두고 박헌영이 “당(黨)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스티코프는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고 지시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이같은 사실은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제주4·3사건이 김일성과 박헌영의 지령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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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8일자 동아일보의 <제주도폭동현지답사> 기사.

소제목에서 <동족살상이 인민항쟁인가>라고 꼬집고 좌익세력에 의한 폭동임을 분명히 보도하고 있다. 특히 <최고 100만원의 살인현상 지령, 극악무자비한 폭상>이라는 또 다른 소제목의 기사를 보면 “인민 해방군은 순경 1만원, 형사 2만원, 경위이상 3만원, 경찰 유력자는 100만원의 살인 현상금을 걸고 살해를 촉구하고, 각 읍면 촌락에는 후원대를 조직하여 물자를 공급케 하면서, ‘목포까지 김일성 군이 내도하였으니 안심하라’는 적 전술을 연출하고 있다”고 돼있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300원이었으니 순경 1명 사살에 쌀 33가마니가 걸렸던 것이다. 이런 막대한 자금은 북한 공산당이 모든 국민이 함께 사용하는 화폐를 극비에 개혁, 구 화폐를 수거하여 남쪽으로 보내 사회를 교란하고 공작비, 파업지원비, 조직비 등으로 사용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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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일성의 ‘남한 단선단정(單選單政)반대와 전조선 통일적 중앙정부 수립’ 호소에 따라 제주도민들이 ‘4·3민중봉기’를 일으켰다는 북한 문헌 및 대남선전선동매체들의 기술내용이다.

◈4·3은 제주도 인민들이 위대한 수령님(김일성) 호소를 높이 받들어 일으켰다

미제침략자들이 조작한 5·10망국단독선거를 반대하여 주체37(1948)년 4월 3일 제주도인민들이 일으킨 반미구국항쟁. 4·3인민봉기라고도 한다.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민족분렬책동과 식민지예속화정책을 감행하여 온 미제는 1947년 10월 조선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에 상정시키고 그 간판을 도용하여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꾸며 냈으며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감시 밑에 남조선에서 5·10망국단선을 실시하고 괴뢰정부를 조작하려고 책동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는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이 영구화될 엄중한 위기가 조성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북과 남의 전체 조선인민들에게 민족분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조선최고립법기관을 선거하고 전 조선적인 통일적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호소를 높이 받들고 남조선로동계급과 함께 제주도인민들은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입국》을 반대배격하는 주체37년 2.7구국투쟁에 일떠섰다. 미제국주의자들은 2.7구국투쟁을 전후하여 제주도에서만도 무려 1만여명의 애국자들을 체포, 투옥, 학살하였다. 그러나 인민들은 5.10망국단선을 반대하는 투쟁에 더욱 힘차게 일떠섰다. 주체37년 3월말부터 제주도인민들은 2.7구국투쟁때 탈취한 무기로 인민무장자위대를 편성하여 한나산을 중심으로 하여 산악지대에 들어 가 근거지를 꾸리였으며 4월 3일 새벽 무장항쟁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미제를 타도하라!》, 《단선단정 결사반대》,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은 철거하라》, 《인민의 원쑤 반동무리들을 처단하라》,《주권은 인민위원회로》 등 구호를 웨치며 도처에서 경찰지서들을 습격하고 경찰들과 주구놈들을 처단하였으며 미제에 의하여 강제해산당하였던 인민위원회들을 다시 복구하였다. 30만의 도내 인민들중 24만을 망라한 봉기군중들은 적극적인 투쟁으로써 제주도에서의 망국단독선거를 완전히 파탄시켰으며 적들의 통치질서를 마비상태에 완전히 빠뜨리게 하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제주도인민들의 투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도내 부락의 절반이상이나 되는 296개의 부락에 불을 지르고 7만여명의 인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그러나 원쑤들의 그 어떠한 발악과 학살만행도 제주도인민들의 영웅적투쟁은 미제와 남조선괴로도당의 야수적폭압과 미제의 고용간첩인 박헌영도당의 간첩행위로 말미암아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인민봉기는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고 민족자주적인 힘에 의하여 조국의 통일독립을 이룩하려는 제주도인민들의 한결같은 지향과 완강한 투지를 뚜렷이 부여 주었으며 미제침략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출처: 『조선대백과사전』 제20권, 백과사전출판사, 평양: 평양종합인쇄공장, 주체89(2000년), pp.348-349)

◈김일성 교시, “제주4.3투쟁은 인민봉기다”

미제의 남조선 단독선거를 저지 파탄시키기 위한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에서 가장 먼저 폭발한 적극적인 투쟁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인민봉기>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조선의 여러 지방들에서는 선거를 반대하는 인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김일성 저작집 4권, p. 376)

◈제주4.3사건은 주체의 기치따라 일어났다

제주도 인민봉기는 주체의 기치따라 유격투쟁과 기타 각종 형태의 투쟁이 결합된 새로운 특징을 지닌 반미 구국투쟁이었으며, 전체 도민 30만 명 중 24만 명이 궐기한 대중적이고 전인민적인 항쟁이였다. 제주도 인민들은 조국의 통일독립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자기 희생성과 대중적 영웅주의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4·3인민봉기>는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5·10단선>을 파탄시키는데 있어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은 <5·10단선>을 반대하여 일어나고 있던 남조선 인민들을 고무하였다. 제주도 인민봉기는 또한 광범한 대중 속에 깊이 들어가 사상 조직적으로 그들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군중을 옳게 조직 동원한다면 원쑤들의 그 어떤 아성도 능히 쳐부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귀중한 경험을 남조선 인민운동사에 남겨놓았다.(출처: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조국통일사, 평양, 1982, pp.137-142)

◈4. 3인민봉기는 제주도인민들의 정의의 반미반파쑈인민항쟁이다

4·3인민봉기는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침략자들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고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제주도인민들의 정의의 반미반파쑈인민항쟁으로 력사의 갈피에 자욱을 새겼다.

미제국주의자들은 2·7구국투쟁을 전후하여 제주도에서만도 무려 1만여명의 애국자들을 체포, 투옥, 학살하였다. 그러나 인민들은 《5·10망국단선》을 반대하는 투쟁에 더욱 힘차게 일떠섰다. 1948년 3월말부터 제주도인민들은 2·7구국투쟁때 탈취한 무기로 인민무장자위대를 편성하고 한나산을 중심으로 하여 산악지대에 들어가 근거지를 꾸리였으며 4월 3일 새벽 무장항쟁으로 넘어갔다.(출처:《우리 민족끼리》주체104(2015)년 4월 3일)

◈제주 4·3은 제주만의 고립된 투쟁아닌 남조선 전체 인민의 구국투쟁의 일환이다

(제주인민봉기가 성공하고 있는 것은) 첫째로는 30만 제주도 전체 인민들이 불타는 조국애로써 강철같이 단결하여 미 제국주의와 그 주구 매국노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도배들의 남조선 분할 식민지 침략정책을 단호히 반대하고 조국통일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제주도 무장구국항쟁은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남조선 전체 인민들의 위대한 구국투쟁의 일환인 까닭입니다. 전국에서 투쟁이 있었기에 적들이 제주도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승리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출처: 김달삼의 해주 남조선 인민대표대회 연설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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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꼬메 2023-02-16 10:31:57
4.3은 북괴지령에 사주받은
박헌영 남로당 일당의 살인폭동
이것은 팩트 증거가 있는데...
무슨 망발들인가
정신들 차리세요. 좌좀들이여
180.***.***.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