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시 호근동 출신 김광협 시인 서거 31주년 추모문학제가 오는 19일 오후 3시부터 솔동산문학회 주관으로 천지연폭포 김광협시비 앞에서 열린다.
이 추모문학제는 서귀포시에서 최초로 중앙문단에 등단했고, 한국문단사의 큰 족적을 남긴 김광협 시인의 문학 세계관을 기리기 위해 후배 문인들에 의해 지난 2015년부터 솔동산문학회 주관으로 해마다 열리고 있으며 올해로 10회를 맞고 있다.
이날 추모문학제 시인의 약력 소개와 함께 시인의 문학 연보를 살피고 김광협의 문학세계에 대해 김광협 시인의 문학 제자인 윤봉택 시인으로부터 회고담이 이어진다.
2부는 후배 시인(조승훈. 한성국. 강성원. 박인선. 현신철. 박용창. 정영자. 박지호. 고현심. 고길선)들이 김광협 시인의 대표시집 『유자꽃마을』에 수록된 머슴살이 3년 살다 보니, 카바이드 불, 감, 부자 농부, 우리나라 땅, 샘이 깊은 물, 호박꽃, 유자꽃 피는 마을 등 9편이 낭송된다.
이날 행사는 서귀포시 소상공인연합회, 한국무용협회 서귀포지부, 천지연휴게소, (사)탐라문화유산보존회, 드림사운드 등 각 단체에서의 각종 지원과 재능 기부 등으로 이뤄진다.

<김광협 시인 약력>
김광협 시인은 1941년 6월 서귀포시 호근동 1851번지 조부모님 댁에서 아버지 김남운 어머니 김사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은 광산이며, 자호는 소운이다. 태어난 이듬해에 아버지가 당시 경성대학 부속 생약연구소에 취직하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 가족들이 토평동 관사로 이사를 하게 된다. 4세 때 석주명 박사가 나비잡는 모습을 보았고, 부친에게 천자문을 익힌 다음,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다시 호근동 조부모 댁으로 가서 서호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했다.
11세가 되던 1951년 4·3사건이 발발하자 외갓집 신효동으로 내려와서 살다가 1953년 서귀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다시 토평동으로 가서 살았다. 1956년 16세에 서귀농림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국어교사 강군황 선생을 만나 문학지도를 받았다. 교내 백일장에 수필 등으로 장원을 하는 등 창작 활동을 하면서, 1957년 17세 때 제1회 한라예술제 백일장에서 시 ‘천지연’으로 장원을 했다. 이후 1959년 19세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하면서 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김광협 시인은 서귀포가 낳은 이 시대의 최고의 시인이자 서귀포시에서 현대 시단에 등단한 최초의 시인이기도 하다. 서귀포시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196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강설기)가 당선됐고,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 제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수도 서울에서 문인으로 대성해 1981년 41세에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1963년 23세에 월간 종합교양잡지 '신세계'에서 공모한 제1회 신인상 시부문에 ‘빙하를 위한 시’가 박두진 선생의 심사로 당선돼 문단에 첫 발자국을 내딛기까지 1956년 서귀농림고등학교(현 서귀산업과학고) 국어교사 강군황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고 시집 '황소와 탱크' 연보에서 밝히고 있다. 시인 박두진 선생은 김광협 시인의 첫 시집 강설기의 서문에서 “시를 쓰는 사람 중에는 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쓰는 사람과 시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쓰는 사람과 시가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를 초월하는 차원에서 쓰는 사람의 세부류가 있다”고 하면서 “김광협 시인은 시가 무엇인지보다는 시가 어떠한 것인지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쓰는 시인임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리고 한기팔 시인은 시인 김광협 선생을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떠나는 시인”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현길언 선생은 김광협 시인과의 사반세기 우정에서 “그의 기질은 아름다운 서귀포의 자연과 감귤꽃 향취에 취해 땅에 순응하고 하늘만 쳐다보며 사는 온유한 모습만은 아니었다. 바람과 돌짝밭과 파도에 닳고 닳은 심장과 무쇠같이 탄탄한 팔뚝으로 자연과 싸우면서 살아온 힘있는 농부의 정서다. 그것은 배반을 용납하지 않고 정직을 훼손하는 모든 상황을 묵과하지 못하는 논리를 세워줬다. 그의 시작과 기자생활을 관류했던 하나의 철학은 바로 거기에서 연유되었다”고 했다.
약관 50세에 이르러서는 건강이 많이 악화됐다. 가끔 고향에 내려오면 음료수 병에 몰래 술을 담아서 마시곤 할 만큼 선생께서는 술을 가까이하셨는데, 이는 분명 척박한 서울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자신만의 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육신이 병마에 지쳐가면서도 선생께서는 1990년 자선시집 '유자꽃 마을'을 펴냈고, 이어서 1991년 번역시집 '아메리칸 인디언 청년시집'을 병상에서 번역 발간했으며, 1992년 제6시집 '산촌서정', 번역시집 '투르게네프 산문시' 또한 병상에서 발간했다.
1990년 유자꽃 마을 책머리에서 선생은 “시인이란 적어도 자기 자신의 삶, 이웃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물론, 자연과 천지 우주에 대한‘각자’ (그것도 대단한)이어야 한다…… 중략…….지금도 나는 모든 것을 연습 중이다”고 했다.
또한 마지막 시집 '산촌서정'의 자서에서 “ 내 시는 아직도 암야행 중이다”하며 자신의 노정에 방점을 했다. 이후 1993년 7월 5일 새벽 2시 35분 강남성모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53세의 나이로 영면했으며, 선생을 서귀포로 운구해 7월 7일 당시 서귀포문학회(회장 강문신) 주관으로 전 회원들의 뜻을 모아 제주문학사에서는 처음 문학회장(서귀포문학장)으로 엄수했다.
1995년 김광협 시인 시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돼 서귀포시의 지원을 받아 1996년 시인 김광협 시인의 시 ‘천지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제 / 너를 닮아 / 살겠다던 소년 / 천자연 / 네 곁에 원히 살으리라”처럼 천지연폭포 입구에 ‘유자꽃 피는 마을’ 김광협 시비가 세워졌다. 이 또한 서귀포는 최초의 시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