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시대의 빛과 바람, 변시지
[평론] 시대의 빛과 바람, 변시지
  • 서귀포방송
  • 승인 2020.10.2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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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희 (공간누보 대표)
우성 변시지화백의 폭풍
우성 변시지화백의 폭풍

황토빛 노란색은 어디에서 왔는가?

황토빛 노란색을 사상思想으로 삼아 그만의 독특한 화법과 화풍을 일궈낸 화가, 변시지(1926~2013). 그의 그림은 누렇거나, 누리끼리하거나, 노랗거나, 노리끼리하거나, 샛노랗거나, 혹은 찬란한 황금빛으로 화면 전체가 온통 출렁인다.

1975년 그의 나이 오십, 제주로 귀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작가는 석양에 물든 제주 바다와 대지를 내려다보며 온통 노란색으로 승화되는 첫 경험을 한다.

“...나도 그 때까지 제주라고 하면 푸름을 떠올렸는데, 석양에 물든 바다나 땅이 모두 황금색으로 변할 때, 풍요로움을 뛰어넘어 경외감마저 느꼈다.”

그렇게 그의 숙명이 된‘노란색.’하나의 색으로 모든 색을 표현했던 작가의 집요함은 제주에서 38년 동안이나 작품으로 이어진다. 변시지의 상징이 된 노란색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 있을까? 일본에서 인상주의의 빛과 색감을 일찌감치 익혔던 서양화가 변시지의 화려한 색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서울시절‘비원’ 그림에서 보여주던 밝고 섬세한 푸른빛은 왜 숨어버린 것일까?

변시지는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했다. 1945년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20살이 되던 해 도쿄로 옮겨 본격적인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다. 변시지는 정통 서양화의 계보를 잇는 데라우치 만지로(1890~1964)를 스승으로 두어, 사실주의 기법과 후기 인상파의 표현 요소들을 익혔다. 그는 일본 화단에서 서양화가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이미 20대 청년 시절에 누려본 조선인 화가였다.

빛을 통해 사물이 갖는 고유의 색은 달라진다. 이것이 후기 인상주의의 요체다. 변시지 역시 빛과 색채의 연관성을 배우며 일본 시절 인물화와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젊은 시절 가장 좋아하고 존경했던 작가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후기 인상파의 대가인 반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라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남프랑스 아를지방의 강렬한 태양빛을 보고 고흐는 ‘나에게 태양은 노랗다’고 토로했다. 제주로 돌아와 아열대 태양을 만난 변시지는 어떠했는가?

“제주는 아열대 태양 빛의 신선한 농도가 극한에 이르면 흰 빛도 하얗다 못해 누릿한 황토빛으로 승화된다. 나이 오십에 고향 제주의 품에 안기면서 섬의 척박한 역사와 수난으로 점철된 섬사람들의 삶에 개안했을 때 나는 제주를 에워싼 바다가 전위적인 황토빛으로 물들어 감을 체험했다.”

변시지의 황토빛 노란색은 이렇듯 일본에서 습득한 인상주의 표현요소와 후기 인상파의 색을 수용, 변용, 재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변시지의 색은 독창적이다. 자연광에서 얻은 색일지 모르나, 작가의 눈으로 재해석된 마음의 색이기도, 더 깊게는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성찰하며 나온 원형의 색이기도 했다.

현란한 색으로 아무리 제주를 표현해도 어색했다는 그가 40년 넘게 익숙하던 모든 색과 기법을 버리고 나온, 단 하나의 색, 바로 황토빛 노란색이다.

한국의 미를 찾으며 깊어진 색

서양화가로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동양정신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그의 황토빛 사상은 의미와 지층을 확장한다. 38년의 제주시절(1975~2013)은 변시지의 노란색이 탈법脫法과 진화를 거듭하며, 자신만의 화격畵格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제주초기와 중기에는 주로 꺼칠꺼칠한 황갈색, 쓸쓸하고도 따뜻한 누런색, 모노크롬한 노란색, 그리고 푸른빛이 엷게 감도는 황토빛 노란색이 중첩되어 나온다. 후기와 말기 작품을 보면 그야말로 찬란한 황금빛 노란색이다. 황갈빛의 누런색에서 순도높은 황금빛 노란색에 이르기까지 그가 제주에서 남겨놓은 천 점이 넘는 작품들은, 한 가지 색으로 얼마나 끊임없이 밝음과 어둠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며 그가 새로운 모색과 출발을 했는지 엿보게 된다.

평론가 오광수는 이런 변시지의 바탕색을 ‘누런 장판지색’으로 비유한다. 혹자는 만물을 키워내는 대지의 색, 곧 생명의 색이라 하다. 변시지 자신은 고향 초가의 마당에서 비가 내려 질퍽질퍽한 땅 위를 깔던 보리낭, ‘짚’의 투박하고 정감어린 색이 떠오른다고도 했다. 이런 독자적인 변시지만의 색채는 그의 표현대로 ‘피부에 닿는 향토적인 것에 매료’되어 나온 것이다.

변시지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색은 형태를 잡아가는 검은 먹색이다. 작가는 검은 색에 숙달된 민족으로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데 검은 색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누런 바탕위에 검은 색으로 형태를 만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먹필로 편지를 썼다. 머리고 까맣고, 눈동자도 까맣고, 먹필도 까맣다. 선은 먹색으로 하는 편이 우리들 정서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민족정신이 깃든 전통적인 풍토 위에,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세우고 싶었던 변시지는 누런색과 검은색을 주조로 삼게 된다. 제주에 정착한 후, 동양미를 탐구하고 추사 김정희의 예술세계에 심취하며 그의 색은 깊어갔다. 더구나, 한학과 수묵화에도 능했던 그가 아닌가? 수묵화와 서양화를 경계 없이 넘나들며 작업하던 그에게 형태를 그린 검은 먹색은 동, 서양을 연결하는 통로의 색이요, 한국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정서의 색이다.

유화든 수묵화든, 그의 작품은 검은 먹색 선으로 형태를 표현함에 있어‘갈필법’과‘일필법’이 특징이다. 서양화가 안진희는 ‘변시지의 회화세계’라는 박사논문에서“서양의 기법에서 시작하여 오랜 실험과 탐색을 거친 후, 동양의 정신과 기법을 수용한 결과물들이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풍경화가 아니라, 동양의 문인화 정신을 반영한 한 편의 시다”라고 평가했다.

동양미학을 공부한 그의 작가노트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황토색과 검은색의 뿌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동양미의 관찰은 천지의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천지현황天地玄璜, 검은 현玄은 하늘의 색이요, 누를 황璜은 땅의 색이다. 하늘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땅은 하늘로부터 받아들여 모든 형태를 만들어낸다. 사람도 그 소산이다.”

바람은 그에게 무엇이었나?

제주에서 바람은 자연의 불모성을 상징한다. 제주사람들은 용암분출로 이루어진 현무암이란 표층 위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흙 속에 묻혀있는 돌들을 꺼내어 땅을 추리며, 매서운 바람을 막아 생존을 확보해야했다. 남성들은 어로작업을 하거나 타지를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죽기도 한다. 해녀들은 돛단배에 의지하여 마파람과 샛바람을 달래가며 바다 건너 육지로 출항을 했다. 육지와 격절된 섬에 부는 외세의 바람도 매서웠다. 제주 4·3이라는 비극의 광풍이 휩쓸고 간 섬이 아니던가? 영등할망의 바람신 신화도, 구멍 숭숭 뚫린 돌담을 쌓아 바람을 다스렸던 삶의 지혜도 섬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오직 바람의 순환에 맞물려있었음을 보여준다. 변시지는 고향의 품에 안기어 이 바람을 만난다. ‘예술의 모체는 풍토’라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정리하던 그가 풍토의 숨골을 바람에서 찾은 것이다. 자연지리학적인 풍토와 정신적 풍토를 넘어서 그가 그토록 추구하던‘인간 본연의 풍토’가 바람 속에 숨 쉬고 있었다. 변시지는 바람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유독 내게는 바람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 많다. 바람 부는 제주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고독, 인내, 불안, 한恨, 그리고 기다림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제주풍토의 요체와 인간 본성의 보편성을 바람을 통해 통합해가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의 고통과 수난의 역사를 바람으로 상징화한다. 시대와 작가는 독특한 방식으로 관계 맺고 연결되기 마련이다.

“태풍이 초가 뒷마당에 몰아친다. 그 폭풍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속의 사람은 태풍에 날아가지 않게, 살아남으려고 구부리고 있는 것이다. 내 작품에서의 폭풍은 독재정권 하의 시달림에 대한 마음 속 저항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작품은 그 작가가 살던 시대의 마음, 심상의 표현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가 하나 되어 온통 황토빛 바람으로 일렁이면, 근경根景에는 폭퐁 속에서 웅크려있거나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구부정한 사내가 나타난다. 때로는 조랑말과 부둥켜안으며 바람을 같이 맞닥뜨린다. 중경中景에는 몰아치는 바람에 휘어지는 소나무와 초가가 보인다. 소나무의 형상을 보면 뼈대로만 버텨내는 작가의 결기가 느껴지고, 추사의 ‘세한도’정신을 연상시킨다. 원경遠景에는 바다 한가운데 아스라하게 작은 돛단배 하나가 흔들리고 있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자기의 존재를 낮춰서 거대한 자연과 한 시대의 폭풍에 그렇게 저항했던 작품 속 이미지는 자신이기도 하다.

‘폭풍의 화가’변시지, 일본에서 소학교 2학년 때 다리를 다쳐 평생 지팡이를 짚고 걸었던 작가는 스스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노인이 된다. 그 노인은 자신이기도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말년의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노쇠한 얼굴을 그린 자화상에 이런 글을 덧붙였다고 한다. ‘이 사람이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 해도 좋다. 나이고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것도 없다.’ 변시지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뜻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제주도를 대표하는 화가라 한다. ...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진정으로 내가 꿈꾸고 추구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제주도’라는 형식을 벗어난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존재의 고독감,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의 정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고,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것이다.”

수평선- 피안과 파안의 경계에서

지팡이, 노인, 조랑말, 까마귀, 해, 바다, 수평선, 돛단배, 돌담, 초가, 소나무는 그의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소재다.

특히, 그의 그림에는 수평선과 돛단배가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한다. 그의 설명을 살펴보자.

“....수평선은 하나의 환상이며, 뛰어난 감각의 상징이다....변화무쌍한 수평선의 굴곡은 신비롭고, 세월의 흐름과 아픔의 사연을 잊게 하는 진실한 무언의 대화를 맛보게 한다...”고 설명한다.

수평선은 그에게 감각적인 구도構圖의 상징인 동시에, 꿈과 이상향을 향한 끊임없는 구도求道의 상징이다. 한편으로는, 수평선이 중심추처럼 흔들리며 면을 가르고 작품 전체의 균형과 조형을 세워간다. 또 한편으로는 이 수평선은 이상과 현실, 삶과 죽음, 파안과 피안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이 경계를 황토빛 노란색이 온통 출렁이며 넘나든다. 수평선이 하늘과 바다와 땅의 경계를 짓고, 노란색이 하늘과 바다와 땅의 경계를 지워간다. 환상과 현실, 삶과 죽음, 고통과 위안, 하늘과 바다와 땅이 뒤범벅되어 넘나들며 결국 하나로 되는 과정이 바로 이 수평선에 담겨있다. 침몰할 듯 위태로운 작은 돛단배 한척은 이 수평선의 경계 끝까지 다가서고 있다. 노인의 시선은 고개는 숙이지만, 발걸음은 늘 그 수평선 너머로 향하고 있다.

변시지는 제주사람들의 꿈과 이상향인 ‘이어도’를 소재로 끌어들여 자신의 예술세계와 중첩시켰다.

“인간의 삶이 고달플수록 이상향을 꿈꾸게 마련이다... 제주인에게 이어도는 바로 그런 곳이다... 그들은 죽어야 갈 수 있다는 환상의 섬, 이어도를 꿈꾸며 살아왔다. 척박한 풍토와 수난의 역사를 겪으며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제주인에게 이어도는 천국으로 존재하는 위안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의 그림이 외롭고 쓸쓸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짓누르는 것 같지만, 위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변시지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보편적 심상을 표현하고, 그를 극복하려는 고결한 정신성을 추구했던 것이다.

변시지의 진보적 역행, 그리고 시대의 빛과 바람 변시지

작가 스스로도 ‘나의 화풍은 세 번의 변신을 한 것 같다’고 말한다.

일본시절 (1943~1956)은, 인상파적 구도에 구상적 표현을 즐겨 썼다. 변시지의 그림에는 우리들과 뭔가 다른 게 있다’라는 일본 내에서의 평가는 그가 예술의 혈통이 한국에 있음을 깨닫고 귀국을 결심한 이유였다.

서울대학교의 초청으로 그는 32살에 한국으로 귀국한다. 일본에서 쌓은 탄탄한 명성과 지반을 버리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며 한국으로 귀국한 변시지. 18년을 보낸 서울시절 (1957~1974)은 비원 등을 소재로 섬세하고 우아한 한국의 전통미를 표현하려고 했다. 극사실주의의‘비원파’화가로 분류되는 시기이다.

그의 나이 오십에 고향 제주에 돌아와 삶을 마칠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38년 동안의 제주시절 (1975~2013)은 풍토에 매료되어 자신만의 독특한 황토빛 노란색과 화풍을 일궈낸 시기였다.

일본에서 일찌감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기법을 익혀온 그가 일본을 떠나 서울에 정착해서는 민족예술을 탐색하기 위해 극사실주의 화법으로 역행했다. 이어, 1970년대 한국의 미술계가 서양미술의 급진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시기로 당시 주류의 화가들이 인상파, 야수파, 표현주의와 엥포르멜 등 추상미술의 기법을 추구하며 유럽으로 향할 때, 그는 반대로 예술의 불모지인 변방의 섬, 제주로 향한다. 한국 미술계의 보편적 흐름을 거스르며 전개되었던 그의 작품 세계. 제주-오사카-도쿄-서울-제주로 이어지는 87년의 삶의 궤적은 어쩌면 ‘진보적 역행’이었던 셈이다.

이제 제주작가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던 변시지를 좀 더 넓은 지평에서 새롭게 조망해야하는 시간이 왔다.

화법畫法을 앞세우는데 그치지 않고 화도畫道의 경지에까지 이끌어가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변시지. 동, 서양 미술의 재료와 기법을 아우르면서 고독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놓치지 않았던 변시지. ‘예술은 완성이 없다. 예술에서 깨달음을 얻는 경지에까지 이르러 작품을 남기는 것이다’라던 변시지.

한국의 민족예술과 현대미술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인가?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지구 전체가 겪고 있는 이 난세 속 고통의 뿌리는 무엇이며, 미술이 거기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 변시지가 그 대답 하나를 내놓고 그가 그려놓은 수평선 너머로 떠나갔다. 그리고 우리 곁으로 다시 찾아왔다. 시대의 빛과 바람’ 변시지 전.

그의 그림 속, 폭풍이 몰아치는 저 망망대해에 위태롭지만 침몰하지 않고 떠있는 저 돛단배를 보라. 가녀린 돛단배 하나가 작품 전체를 끌고 가지 않는가? 이번 전시회가 절망적 세계의 늪에 침몰하지 않는 돛단배처럼 작은 위로와 희망의 초대장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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