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세계』(1) 질문해도 될까요?
『평범한 세계』(1) 질문해도 될까요?
  • 서귀포방송
  • 승인 2025.02.0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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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시인
이정은 작가의 그림 '평범한 세계'
이정은 작가의 그림 '평범한 세계'

다섯 개의 물의 장면           

                                     이정은 시인

1

11월, 시침은 어디로 가고 없을까

카라꽃 조화를 11년째 키우고 있어요

물 없는 화병에서 꽃대는 올라오고

하얀 꽃잎은 향기를 뿜은 듯 버성기네요

속아주어야겠어요, 꽃이고 싶어하잖아요

빈 화병에 물을 줍니다

찰랑찰랑 아파트 지하 수면실로 타고 내려가요

보일러 아저씨 잠이 깨요

달력 한 장 젖어요

2

양수리 두물머리

검푸른 물의 흐름이 엉켜있어요

마른 장작 타는 체취, 당신을 불러들인 건 나의 실수였습니다

목으로 넘어가는 와인 한잔이 나의 독주이기를

같이 했던 시간들은 윤슬처럼 흩어집니다

물의 카페에서 멀어질 때까지

3

어쩌지, 양수가 흘러내려

생명 다한 꺼져가는 촛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녹아 굳어버린 촛농들을

무덤 삼아 수그러드는

작은 호흡

물의 끝은 여기까지

인큐베이터 안이 추워

4

어느 시인과 사랑을 했어요

더 이상 뭘 원하시는 거죠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몰라요

5

구피의 유영이 당신의 눈동자를 흐리게 하지요

몰려다니다가도 삐진 양 꼬리치며 돌아서는

구피의 번식력이 안방을 휘젓고 있죠

앉아 있을 장소조차 없이 불어난 구피 종자들

쏟아진 물난리에 익사를 조심하세요

물의 장면, 되돌이표를 그려 넣을까요

*김종삼의 시 <민간인>

출처: 이정은 『평범한 세계』 시인동네 2023

친애하는 독자님께!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정은 시인의 「다섯 개의 물의 장면」을 함께 이야기해 보려고 해요. 이 시는 다섯 개의 다른 ‘물’의 장면을 통해 인생과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에요. 하나씩 살펴볼까요?

첫 번째 장면: 11월의 빈 화병

시인은 ‘카라꽃 조화’를 11년째 키우고 있다고 해요. 조화(가짜 꽃)인데도 꽃대가 올라오고, 향기가 나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그것은 사실 착각이에요. 시인은 그것을 받아들이며 "속아주어야겠어요, 꽃이고 싶어하잖아요"라고 말해요. 이 모습은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인간의 감정을 보여줘요. 결국, 빈 화병에 물을 주고 그 물이 아파트 지하로 흘러가 보일러 아저씨를 깨우죠. 달력 한 장이 젖는 장면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듯해요.

두 번째 장면: 양수리 두물머리의 검푸른 물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검푸른 물이 엉겨 있어요. 시인은 마치 후회하듯 "당신을 불러들인 건 나의 실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와인을 마시며 그 시간이 ‘독주’였기를 바라죠. 사랑과 후회, 흐려지는 기억이 ‘윤슬(물 위 반짝이는 빛)’처럼 흩어져요. 이는 지나간 사랑과 남은 상처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세 번째 장면: 흐르는 양수와 촛불

‘양수’는 생명의 물이지만, 여기서는 ‘꺼져가는 촛불’과 연결돼 있어요. 이미 생명을 다한 촛불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절망이 담겨 있죠. 인큐베이터 안이 춥다는 표현은 미숙아나 연약한 생명, 혹은 보호받지 못한 존재를 암시하는 것 같아요.

네 번째 장면: 시인과의 사랑,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물

시인은 사랑을 했지만, "더 이상 뭘 원하시는 거죠"라고 말합니다. 이는 사랑의 끝에서 느끼는 공허함일 수도 있고, 상대방이 계속 무언가를 원하지만 줄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어요. 울음을 터뜨린 영아를 삼킨 물, 그리고 "누구나 그 수심을 몰라요"라는 말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느낄 수 있어요.

다섯 번째 장면: 구피와 번식하는 물

구피는 작은 열대어지만 빠르게 번식해요. "몰려다니다가도 삐진 양 꼬리치며 돌아서는" 모습은 인간관계와도 비슷하죠. 너무 많아져서 앉을 자리조차 없는 구피들은 혼란을 상징하는 듯해요. 결국 "쏟아진 물난리에 익사를 조심하세요."라는 말로 시인은 어떤 위기감을 전하고 있어요.

마무리하며

이 시는 ‘물’이라는 공통된 요소를 통해 시간, 후회, 사랑, 상실, 번영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고 있어요. 각각의 장면이 따로 떨어져 있는 듯하지만, 결국 인생에서 겪게 되는 감정과 사건들이 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이 시가 당신에게도 의미 있는 울림을 주었기를 바라며, 다음에 또 좋은 이야기로 찾아뵐게요.

이정은
이정은 시인

<이정은 시인>

서울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다. 고려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석사 졸업했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을 수료했으며, 2022년 《뉴스N제주》 신춘문예에 당선한 바 있다.

현재 제주작가회의 회원, 〈교육문예창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년 제주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시집 『평범한 세계』를 출간했다.

E-mail: lje794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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