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김흥수‘ 화백의 문화집 선보여..
[신간] ‘김흥수‘ 화백의 문화집 선보여..
  • 장수익 기자
  • 승인 2023.06.02 0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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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맞이미디어 4‧6배판 329페이지 올칼라
한국화단의 거목 김흥수 하모니즘 창시자

 

㈜해맞이미디어에 따르면, 한국화단의 거목 김흥수 하모니즘 창시자 작고한 지가 8년이 되어 김흥수 화백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문화집을 최근 발간했다.

<김흥수 화백은 누구인가>

그를 알려면 출생지, 학력, 전시경력, 작품세계 등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고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를 알기에는 너무나 정보가 열악한 실정이다.

작가의 내면의 삶이 드러나지 않아 표피적인 정보로 접근하는 오류가 있다. 김흥수 화백의 정신세계를 펼쳐 보일 수 있는, 아니 담고자 하는 우리의 용량이 감당하지 못할 뿐이다. 미국에 체류한 12년 동안 화가로서 자유를 경험했다.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동양의 음‧양‧추상적 구성의 방법에 대한 접근과 실험이 자유였으며, 동양인에 대한 무관심이 자유였으며, 작가로서 자유는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자유는 이원적 조형주의였다. 한국적인 자기의 뿌리-그 뿌리에 연결되는 시적인 근본적 향수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보편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실존적이며 변증법적인 방식을 발간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영적이며 철학적이다.

그가 추구한 자유이며 자유라는 말 속에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 하모니즘은 자유에서 추출한 레시피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흥수 화백은 ’나는 자유자‘라고 한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외적 자유가 아닌 내적인 자유는 창작에 대한 실험과 연구였다.

김흥수 화백을 ’한국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칭해도 과언이 아니고 도리어 부족할성 싶다. 추상과 구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으며, 근대회화와 현대회화의 경계 구분없는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지휘했다.

서양미술을 탐닉하고 모방하려 했던 시절이 있었다.

잘 그린 것이 그림이라고 생각됐던 시절에도 한국미술의 개념에 집중했으며, 이론으로서 얻은 절대적 작업세계는 유럽과 미국에서 한국적인 것으로 세계 미술사에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해외에 머물수록 우리 것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했으며,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전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작품을 발표했다.

오늘날에도 국적없는 작품들이 서로 표절해도 김흥수 화백은 정신을 지켜가면서 한국현대미술을 해외에서 발표했다. 이데올로기 세대에도 우리의 삶과 정신이 지표가 됐던 한국작가임을 부그러워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정신을 강조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수많은 작가들이 과거 김흥수 화백이 걸었던 실크로드같은 길을 기억할 수 있을까. 김흥수 화백이 대륙의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과 영향력은 이제 조금씩 퇴색되어지고 있는 것이 다시 회복되어지고 예술적 가치와 기록들이 재조명되어지기를 기대한다.

생전에 김흥수미술관을 인수해 그의 정신을 지키고자 하지만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김흥수 화백의 정신은 문화국가로서 후학을 가르치는 것과 한국미술의 당당한 자존감 회복이다.

평생 다니면서 마난 작가들에게 이웃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것이 캔버스 안의 색채로서 하모니가 아닌 삶의 하모니를 보여주고 실천했다.

모든 창작자들이 자유를 꿈꾸지만 자유롭지 못하기에 올곧은 창작의 맥을 찾지 못하고 있다면 자유롭게 살다간 김흥수 화백의 삶을 소개하고 싶다.

김화백의 선구자적인 한국 대표화가의 작품성은 이미 프랑스 화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이어서 워싱턴D.C에서의 하모니즘 선포는 세계적인 화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를 인정한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인 러시아의 푸쉬킨과 에르미타주미술관에서 생존작가로는 마르크샤갈에 이어 두 번째로 아시인으로는 처음으로 하모니즘의 예술성을 인정받아 획기적인 초청 전시회를 갖고 국위선양을 한 사실은 한국미술계의 긍지를 갖기도 했다.

한국화단의 거목 김흥수 하모니즘 창시자
한국화단의 거목 김흥수 하모니즘 창시자

<김흥수 화백 약력>

1919년 함흥시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남

1932년 함흥고보에 입학

1936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유화(밤의 정물) 초입선

1938년 동경미술학교 입학을 목표로 도일, 예비과정으로 가와바다화 학교에서 데생을 수학함

1939년 서울의 선전(제16회)에 유화 ’희숙의 상‘ 두 번째로 입선

1940년 동경미술학교 유화과 예과에 입학

1941년 동경미술학교 유화과 본과에 진학

1944년 제23회 선전에서 ’밤의 실내정물‘ 특선, 2차대전의 조기졸업 조치에 따라 동경미술대학교를 조기에 졸업함

1949년 서울동화화랑(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부설)에서 첫 개인전 개최

1954년 서울대 미대강사로 출강

1956년 파리 국제미술전에 ’백일‘ ’길동무’ 출품

1957년 파리 라라뱅시 화랑에서 체불 첫 개인전 개최, 파리국립미술관 주최 재파리 외국인전에 ‘두 포오즈’ 차석상 수상

1959년 라 벨 갸브리엘 화랑과 계약

1961년 제10회 국전에서 심사위원으로 선임되어 ‘마스크’를 기필해 출품

1967년 6월 ~ 1968년 6월. 미국 Philadelphi의 moore College of Art 초빙교수로 회화와 드로잉을 가르침

1970년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미술교육 강사

1971년 Woodmere Art Gallery 주최 ‘이 해의 수작 초대전’에서 ‘고민’으로 1등상 수상

1976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에 ‘불사조’ 출품 대상 수상

1981년 Kimsou 누드소묘 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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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5세의 나이로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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