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난골, 2024년 4월 22일 발행 / 판형: 장사륙판(124×198mm)
쪽수: 151쪽 / 정가: 12,000원 / ISBN 979-11-92651-26-2 03810
![[신간] 한명희 시집, 스위스행 종이비행기](/news/photo/202504/11194_19015_17.jpg)
등단 30년이 넘는 한명희 시인의 시집 '스위스행 종이비행기'가 시인수첩 시인선 86번째로 출간됐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지금까지 그가 생산한 문장과 우리를 향해 쏟아낸 사유의 지평을 ‘아나키스트’의 위험하고 매혹적인 지평까지 정교하게 파내려감으로써, 자신의 미학을 더욱 확대하고 공고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연하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시인의 결코 에두르지 않는 문장의 묵직하고 매운맛을 느끼게 된다.
한명희의 시를 읽으면 어떤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는 황정산 시인(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그러한 강도는 시인이 추구했던 내적, 외적 자유로움에서 오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많은 것들에 딴지를 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미신과 헛된 편견으로부터 온 것인지 우리에게 까발려 준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신념도 가치도, 우리가 의지하고 살고 있는 가족이나 제도나 인간관계까지도 모두 벗어난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시인의 시를 읽는 순간 우리는 모두 시인을 따라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버리고 때로 내게 주어진 생명까지도 버리고 가볍고 투명한 존재가 되고 싶어진다. “부모가 깔아놓은 길과 / 스승이 알려준 길의 교차점 / 그 어디쯤 / 거기서 그는 길을 잃었다 // (중략) // 투명해져야겠다는 생각이 / 온몸 가득 차올랐을 때 / 그는 거기서 뛰어내렸다 // 아무에게 묻지 않고도 / 스스로 길을 찾아내었다”(「투명」)는 이 불가항력적인 역린이, 저항과 되새김이 그 실체가 아닐까.
황정산 시인은 다시 강조한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이라고. 부모도 스승도 신앙도 규범도 가르쳐 주지 않은,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길이기도 하지만 투명하게 자신의 존재까지도 지워야 할 위험한 길이기도 하다. 한명희 시인은 이 시집의 시들을 통해 이 위험한 길로 갈 것을 담담한 어조로 설득하고 있다.
이 같은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작품의 전개는 ‘여성’이기 때문에 부여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욕망과 금기를 단숨에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념과 의지로도 표출된다. 물론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도약은 아나키스트-되기의 한 계보를 이룬다.
이를테면, “저주는 풀렸어도 / 구두를 벗지는 않을 거야 / 큐빅이 박힌 빨간 구두를 신고 / 계속 춤을 출 거야 // 악사여 연주를 계속해요 / 더 크게 더 빠르게 // 발가락에서 피가 솟고 / 구두에 핏물이 고여도 / 춤을 멈추지 않겠어요 // 잘린 발목으로 / 계속 원을 그리겠어요 / 더 크게 더 빠르게 // 저주의 주문은 짧고 / 춤추는 밤은 길었지요 / 덕분에 나는 / 모든 스텝을 익혔어요 // 슬로우 슬로우 퀵 퀵 / 슬로우 슬로우 퀵 퀵 // 악사여 연주를 계속해요 / 저주의 날들을 / 계속 기억하겠어요 / 빨간 구두를 신고 / 크게 크게 원을 그리면서”(「빨간 구두 아가씨」)에 은밀하게 나타나고 있듯, 시인은 자신에게 부여된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젠더를 주시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교차하며, ‘아나키스트’로서 백지화하려고 한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시집에 잠재된 매혹과 위험을 동시에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시인은 가부장이라는 악습을 필사적으로 밀어내려는 시도도 지속한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 저는 요즘 마천루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 높은 빌딩일수록 / 첨단공법이 많이 들어가니까요 / 하중을 분산시키는 방법을 / 찾아내고야 말겠어요 아버지 // 우리 아버지 / 요즘은 무엇을 연구하실까 / 무엇이든 아버지 / 제 걱정은 마세요 / 저는 아버지와 다르니까요”(「거미줄 연구가」)와 같은 작품에서 나타나듯, 시인은 가부장을 대체할 이념 찾기에 골몰하기도 한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아버지와는 다르다’는, 평범하면서도 구체적인 진리 때문이다. 다름으로써 파생되는 차이는, 그것이 보편적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충분히 아름답고 건강하다.
◨ 다음은 시집에 관하여 시인과 나눈 짧은 인터뷰 내용이다.
[Q] 주제와 이야기의 방향은?
[A] 내 시에 일관된 주제나 방향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의식적 차원에서의 분석이라면 분명 내 시집 속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의식적으로 어떤 주제를 가지고 써야겠다고 해 본 적은 없다. 네루다를 알기 훨씬 이전부터도 나는 ‘시는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나에게로 시가 오게 만드는 어떤 ‘주술’ 같은 것은 있다. 그러나 그것까지 밝힐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 부끄러운 것이므로.
[Q] 이번 시집의 특징은?
[A] ‘나’가 나 혼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타인’들 속에도 내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나를 타인처럼 들여다보고, 타인들을 나처럼 들여다보아야 했다. 내 속에 너무 많은 타인들의 목소리와 타인들 속에서 발견되는 나의 모습에 주목했다. 이 모든 ‘나’는 희극보다는 비극에, 양지보다는 음지에, 낮보다는 밤에 조금씩 치우쳐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경쾌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비극을 맑고 밝은 톤으로 노래했다.
[Q]나는 어떤 시인인가?
[A] 나는 규정되기 싫어하는 시인이다. 너는 이렇다고 누군가 정의하는 순간,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준비를 한다. 아니다. 더 정확히는 그것만이 내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남들이 아는 나와 내가 나는 나의 불일치. 그 속에서 내 시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꿈틀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 보려는 시인이다. 「저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프로필>
한명희 시인
1992년 《시와시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꽃뱀』 『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 『두 번 쓸쓸한 전화』 『시집 읽기』 등이 있다. <시와시학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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