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3·1절 발포사건과 남로당 지령서

한라산 (필명) 4·3주간 특집(3)

2023-04-05     서귀포방송

03 3·1절 발포사건과 남로당 지령서

1946년 3월 20일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대비해 남한에서 남로당 세력이 우세하다는 세력을 과시하고, 미군정을 압박하고 반탁파 우익을 배제한 후, 친탁파 좌익 남로당만이 임시정부를 구성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소련의 지시에 따라 남로당은 1947년에 이르러 조직 정비를 서두르는 한편 대중투쟁의 핵심과제를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촉구에 두고 이를 추진해 갔다. 이에 따라 남로당은 제28주년 3·1절이 다가오자 3·1절을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투쟁과 결부시켜 기념대회를 연대적으로 개최할 것을 결정했다.

제주 4·3 연구소에서 발행한 「제주항쟁」 창간호에 의하면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7년 2월 16일자 남로당 제1차 지령서를 통해 ‘3·1운동 기념투쟁의 방침’을 하달해 2월 17일에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 교육계, 유교, 학교단체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석하여 ‘3·1기념행사 준비위원회’를 결성했고, 이 과정에서 민전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안세훈, 김정로를 비롯한 30여명의 발기로 민전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제주도민전 결성 때 스탈린, 김일성, 박헌영 등을 명예위원으로 추대했다.

2월20일자 남로당 2차 지령서를 통해 3·1운동 기념 방법과 목표를 지령했다. 투쟁목표는 ‘남조선노동당을 지지하고 그 지도하에 쉬지 않는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또 사회노동당을 위시한 일체의 기만적 회색분자를 소탕하며, 우익이라 칭하는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숙청하라’고 지령했다.

미군정은 전국적으로 폭동화 조짐이 보이자 수석 민정관에게 지시해 시위 및 집회 승인권을 주둔군 사령관에게 미군정 사령관이 행하도록 조정해 3월 폭동설에 예방적 조치를 실시했다.

2월 21일 제3차 지령서를 통해 남로당에서는 당비납부 독촉 및 당원명부 제출 에 관련된 내용을 하달하였고, 제주감찰청은 3·1절기념준비위원장 안세훈외 5명을 불러 시위절대 금지한다는 방침을 통고하였다.

2월 22일 조선민주청년동맹제주도위원회가 읍·면단위까지 조직을 완료하고, 2월 23일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 (약칭 제주도민전)이 조직되고, 여기서 스탈린·박헌영·김일성·허헌·김원봉·유영준을 명예의장으로 추대했다. 제주도에 2월 23일 충남·북 지원경찰 100여명을 증파하는 등 전국적으로 긴장관계가 고조됐다.

남로당은 2월 25일 제4차 지령서를 통해 ʻ3·1운동기념 캄파전개에 관한 건ʼ을 하달했다. 특히 이 지령서 중에서 ‘대중의 호흡을 같이 할 수 있고 감정을 격발 시켜 전취하고......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대중의 감정을 격발시키려면 그럴만한 요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발포사건과 같은 돌발변수를 조작하라는 지령이다.

제주북국민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 집회에서 ‘일부 군중들은 경찰서를 습격해 피검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불응하면 강력한 태도를 취한다는 내용의 결의를 박수로 찬동을 얻고......라는 기록(강재훈의 제주4·3의 실상)을 볼때 주최측이 투쟁구실로 의도적으로 기획한 함정에 빠저 대중에게 감정을 격발시킬 발포사건이 발생했다.

2월 24일경 제5차 남로당 지령서를 통해 민전선거강령 선전에 대한 지령을 하달했다. 지령서 말미에 ‘민전지방선거 실천만세’를 부르도록 한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1946년 12월 16일 스티코프가 ‘끄라프조프’를 호출해 지방자치선거와 관련된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행동방침과 대회소집 가능성 및 입법기관의 창설에 관한 지시사항을 명하다 라는 기록(스티코프 일기)으로 보아 스티코프의 명령이 남로당을 통해 남로당제주도당 까지 하달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2월 25일 제6차 남로당지령서를 통해 3·1운동기념 캄파에 전개에 관한 건을 하달했다. 이 지령서에는 ‘우리들 지도자 박헌영 허언 선생,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르도록 했는데 이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북한정권이 첨병역할을 자임토록 한 것이다.

위와 같은 긴장된 상황 속에서도 제주 북국민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에서 개최된 ‘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는 3만여 명의 도민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 넘는 주민들이 참석한 셈이다.

3·1기념대회의 주요 슬로건은 “삼상회의 결정 즉시 실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3·1정신으로 통일독립 전취하자” 이었지만, 이외에도 “친일파를 처단하자”, “부패 경찰을 몰아내자”와 “양과자를 먹지 말자”의 반미구호도 등장했다.

또한 “10월인민항쟁(대구10월사건)은 3 ‧ 1운동의 혁명적 정신과 혁명적 요구를 계승한 위대한 민족적 투쟁이다. 10월인민항쟁 만세!”, “북조선 민주개혁은 조선 민주 완전독립의 토대를 튼튼히 구축하고 있다. 남조선에도 북조선과 같은 민주개혁을 즉시 실시하라.”, “3 ‧ 1운동 이후 혁명적, 역사적 결정체요 조선인민의 위대한 정치적 창의에서 탄생된 인민위원회에 모든 정권을 넘기라.”, “일제 통치기구를 철저히 분쇄하라! 모든 정권은 인민위원회에 넘기라!” 등의 정치적 구호도 등장했다.

한편 기념행사가 끝나자 곧 관덕정 광장을 향해 가두시위가 시작됐다. 1만명가량이 참여한 대규모 행렬이었다. 관덕정의 제주감찰청 앞에는 응원경찰과 미군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그 자리에서 발포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서를 습격하려는 것으로 오인하고 경비경찰 들이 발포함으로써 6명의 민간인이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했고 6명이 부상당했다.

1948년 2월 25일 남로당 제4차 지령서를 통해 ʻ3·1운동기념 캄파전개에 관한 건ʼ을 하달했다. 특히 이 지령서 중에서 ‘대중의 호흡을 같이할 수 있고 감정을 격발시켜 전취하고...... ’부분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는 대중의 감정을 격발시키려면 그럴만한 요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발포사건과 같은 돌발변수를 조작하라는 지령이다. 제주북국민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 집회에서 ‘일부 군중들은 경찰서를 습격해 피검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불응하면 강력한 태도를 취한다는 내용의 결의를 박수로 찬동을 얻고......라는 기록을 볼 때 주최측이 투쟁구실로 의도적으로 기획했다.

『S. B. Griffith는 모택동의 게릴라전』에서 게릴라 형성과정에서 초기단계는 적의 인민을 탄압하고 인민대중을 살해하면 대중의 지도자가 나서서 이에 저항할 것을 선동케 된다고 서술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3·1절 발포사건은 모택동의 혁명전쟁론을 바탕으로 투쟁의 분노를 유도하고 하기 위한 돌발변수를 마련하라는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말발굽에 놀란 우발적인 사고에 의도적으로 과장 투쟁의 분노를 유도한 의도된 사건이다.

결국 3·1절 발포 사건은 모택동의 혁명전쟁론이론에 따라 투쟁의 분노를 유도하기 위한 남로당 지령에 의해 이뤄진 기획된 사건이다.

※ 남로당지령서는 제주 4·3 연구소에서 발행한 「제주항쟁」 창간호에 수록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