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1949년 제주 4.3 오늘
[기고] 1949년 제주 4.3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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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6.0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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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방수 칼럼니스트 【제주4·3사건 칼럼 제1회】 

72년 전 오늘 1949년 6월 7일 제주4·3사건 당시 제2대 제주도인민유격대장 이덕구가 경찰과 교전하다 사망했다. 이때 그의 직속 부하인 '양생돌'의 주머니에서 극비 메모인 '<극비>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가 발견됐으며 이 극비 보고서는 1948년 3월 15일부터 7월 24일까지 무려 4개월 10일간에 이르는 제주도인민유격대의 투쟁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덕구 산전
이덕구 산전

제주도인민유격대 초대 사령관인 김달삼이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러 간 뒤 제주도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았다.

유격대는 게릴라전 부대로서 소련에서는 ‘빨치산 부대’, 모택동은 ‘유격대’라고 불렀다.

당시 미군이 5천여 명으로부터 심문해 얻은 정보자료인 '브라운 대령 보고서'에 의하면 ‘제주도인민유격대는 2개 연대와 보충 전투대대’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정부에 선전포고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554쪽 사건일지에 의하면 ‘ 1948년 10월 24일 무장대 이덕구 명의로 정부에 선전포고, 토벌대에 호소문 발표’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국방군과 경찰관에게 보내는 선전포고문과 호소문 약 3천매를 제주신보사 (주필 김호진)에서 인쇄해 살포했다.

제주4·3사건에서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작전은 선전포고 이전과 선전포고 이후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전개됐다.

시 기 목 표 전투 양상

전투 결과(사망)

선전포고 이전

〇 5·10 선거 반대

〇남조선인민대표자 지하 투표

테러 (경찰지서 습격 및 요인 암살)

경찰서 습격 33회

군·경 및 우익인사 420명

선전포고 이후

 

전면전을 대비한 후방 제2전선 형성

유격전 및 기동전

무장대 : 3,000여명

토벌대

군·경 : 260 명

우익인사:약 500 명

(표1. 제주도인민유격대 전투양상)

선전포고 이후 주요 전투

선전포고 이후 주요 전투를 살펴보면

전투명 일시 참가 병력   결과(사망)
   

토벌대

무장대

 

장전리 전투

  9연대 1대대 210명 무장대 : 100여명

한림 전투

  9연대 2대대 120명 군 : 18명
신엄리 전투   9연대 7중대 30여명

군 : 10명

무장대 : 30명

오등리 전투 1949. 1. 1 2연대 2대대 100여 명

군 : 10명

무장대 : 30여명

월평리 전투 1949. 1. 6 2연대 2대대 1개 중대

군 : 3명

무장대 : 30명

위귀리 전투 1949. 1. 12 2연대 2대대 200여명

군 : 2명

무장대 : 51명

봉개지구 전투 1949. 2. 4 2연대 3대대   무장대 : 360명
남원산록 전투 1949. 2. 5 2연대 700여명 무장대 : 160여명
노로오름 전투 1949. 3. 9 6여단 1개 중대 50여명 군 : 36명
녹하악 전투 1949. 5.6-7 4개 대대 1개 대대 무장대 : 160여명

(표2. 제주도인민유격대 선전포고 이후 주요 전투)

여기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제주4·3사건의 실상'에서 기록된 ‘녹하악 전투’를 소개하고자 한다.

제주도전투사령부는 1949년 3월 말에 4개 대대를 동원해 인민유격대 토벌작전을 전개했는데, 작전 개념은 3개 대대를 압박 부대로서 북에서 남으로 공격하고, 1개 대대를 차단 부대로서 적악-노루악-현대악을 잇는 선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쫓겨 오는 인민유격대를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차단부대인 제1대대 4중대는 계획된 차단선으로 새벽녘에 진출하다가 5시경에 인민유격대와 조우했다. 인민유격대가 고갯마루를 선점하고 있는 상황이라 불리했지만 중대장은 정면의 적을 견제하고 일부 병력으로 적의 측후방으로 기동시켜 기관총으로 공격함으로써 당황한 인민유격대는 10여 명의 시체를 버리고 1km 정도 물러섰다. 포로를 심문한 결과 이들은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가 직접 지휘하는 1천여 명의 병력으로서 1중대 기지를 습격하려고 이동중이었다. 이러한 많은 병력은 도당에서 관장하는 인민유격대와 면당에서 관장하는 자위대가 합세한 병력이었다.

제4중대는 1km 정도 물러나서 저항하는 인민유격대와 수 시간 동안 교전을 하다가 중대장의 돌격 명령에 따라 일제히 돌격하자 인민유격대 한쪽이 무너졌다. 이에 힘을 얻은 4중대원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공격하자 인민유격대는 많은 시체를 버리고 분산, 도주했다.

제주도전투사령부는 이날 전투에서 사살 178명, 소총 203정, 권총 4정, 기관총 2정을 노획하는 4·3사건 중 단일전투에서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인민유격대는 이날의 전투 이후로는 대규모의 부대 운용을 하지 못했는데, 이 전투로 치명상을 입었다.

인민유격대의 마을 피습

인민유격대는 1948년 11월 28일 남원면(남원리, 태흥리, 위미리)을 무장병력 약 2백여 명과 비무장병력 5백여 명이 습격해 마을 주민 89명이 희생됐다. 이때 임신 6개월인 김oo을 살해하고, 15세 소년을 납치 구덩이에 파묻기도 했다고 정00씨는 당시 상황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기록으로 제출했다. 또한 1948년 12월 31일 위미리 2차 피습 때는 위미리 거주자의 손과 발은 물론 심지어 성기까지 잘라 길에 버렸는데 5kg을 넘을 정도였다고 강00씨는 증언 기록을 제주4·3특위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수정의견 접수 보고서'에 남겼다.

1949년 11월 5일 인민유격대 3백여 명의 중문리를 습격해 경찰관 2명의 피살되고, 면사무소와 중학교가 소각되고, 75채 가옥에 불을 질렀다

인민유격대가 세화리(1948년 12월 3일) 40가호 150채를 소각시켰고 총 48명의 희생당했고, 성읍리(1949년 1월 13일)에 인민유격대가 습격해 방화 및 주민 38명을 살해했다. 또한 하례리(1949년 1월 3일)를 습격해 식량을 약탈하고, 초등학교를 불태웠으며 주민 25명이 살해당했다.

한편 김찬흡의 '20세기 제주인명사전'에 의하면 북한당국은 이덕구의 공을 높이 평가해 ‘국기훈장 3급’을 수여했고, ‘조국통일상’을 추서했으며,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능에 있는 그의 가묘의 비석에 ‘남조선 혁명가’라는 비문을 새겼다.

그림2.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십자형 틀에 이덕구 시체를 전시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십자형틀에 이덕구 시체를 전시
사진3. 이덕구 묘비
이덕구 묘비
사진4.  이덕구 묘비
이덕구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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